처음엔 꽤 가볍게 시작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파리라는 배경도 그렇고, 밤마다 다른 시간으로 들어간다는 설정도 그렇고, 그냥 낭만적인 판타지처럼 보였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생각보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자기 삶에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 과거라는 환상 쪽으로 계속 기울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보는 내내 예쁘고 즐거운 장면이 많은데도, 다 보고 나면 묘하게 씁쓸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결국 옛 시절을 동경하는 영화라기보다, 지금을 견디지 못할 때 사람은 얼마나 쉽게 다른 시간대를 이상화하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 점이 생각보다 더 현실적으로 들어왔다.
파리라는 배경의 힘
이 영화는 솔직히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비 오는 거리, 카페, 오래된 건물, 밤공기 같은 것들이 너무 노골적일 정도로 낭만적으로 찍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단순히 관광지 구경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길이 낯설고 아름답게 보일수록 주인공 길은 현재의 자기 삶에서 더 붕 뜬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파리는 배경이 아니라 거의 길의 감정처럼 느껴졌다. 지금 사는 현실보다 조금 더 믿고 싶은 세계, 조금 더 살고 싶은 시간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화면은 계속 예쁜데 그 안의 사람은 계속 어딘가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 분위기를 더 묘하게 만들었다.

길이라는 인물의 답답함
길은 호감이 가는 인물이긴 했지만, 동시에 꽤 답답했다. 현실의 약속과 관계는 자꾸 흘려보내면서 자기 머릿속의 이상적인 세계 쪽으로 계속 도망가려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음은 이해됐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금보다 더 멋진 시대, 더 순수했던 시절, 더 예술적이고 더 반짝였던 시간대를 상상해보니까. 그런데 영화는 길의 그런 동경을 무조건 멋있게만 보지 않았다. 보다 보면 이 사람은 파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기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파리와 과거를 핑계로 삼는 건 아닐까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인물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낭만적인데도 완전히 멋있게만 보이지 않는 그 애매함이 좋았다.
과거로 가는 밤의 리듬
밤마다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설정은 뻔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는데, 영화는 그 장면들을 꽤 영리하게 썼다. 단순히 유명 예술가들을 구경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고, 길이 왜 그 시간에 끌리는지를 점점 더 납득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 시절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장면들은 재미있었다. 헤밍웨이, 피카소, 피츠제럴드 같은 이름들이 줄줄 나와도 과시적으로 보이기보다, 길의 환상이 하나씩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시간이 쌓일수록 오히려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점점 선명해졌다. 누구에게나 황금기는 자기 바깥 어딘가에 있다는 착각 말이다. 이 부분이 꽤 좋았다. 설정은 판타지인데 메시지는 너무 현재적이라서 더 오래 남았다.
로맨스보다 더 남았던 것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로도 볼 수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랑 이야기보다 자기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쪽이 더 크게 남았다. 물론 길이 누구와 더 잘 맞는지, 어떤 관계가 허상에 가까운지도 영화 안에서 중요한 축이긴 하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결국 핵심은 연애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길이 어디서부터 자기 삶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는가 쪽에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갈수록 영화가 더 괜찮아졌다. 단순히 환상을 따라가다가 사랑을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환상 속을 충분히 걸어본 뒤에야 현실의 결을 조금 받아들이게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쁘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은 영화
좋았던 건 영화가 끝까지 밝고 경쾌한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속에 든 감정은 생각보다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디 앨런 영화 특유의 말 많은 대화와 재치 있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게 단순히 분위기만 예쁘게 포장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반대로 아쉬운 점도 조금 있었다. 몇몇 인물은 다소 기능적으로 느껴졌고, 길 주변 사람들은 길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인물 하나하나를 깊게 따라가는 영화라고 보긴 어려웠다. 그래도 이 영화는 인물의 복잡함보다 정서와 아이디어 쪽에서 더 힘을 가지는 작품이라, 그 부분은 어느 정도 감수하게 됐다.
끝나고 나서 더 마음에 남는 문장
다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건 결국 지금을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자꾸 다른 시절을 더 낫다고 생각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덜 빛난다고 느끼기 쉽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은 길처럼 과거의 파리에 같이 취해 있었는데, 끝날 무렵에는 오히려 지금의 삶을 자꾸 미루고 이상화된 어딘가만 바라보는 태도 쪽이 더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예쁜 영화였다기보다, 예쁜 환상을 통과해서 겨우 현실을 조금 받아들이게 만드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혼자 보면 유난히 더 좋을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황금기를 바깥에 두고 상상해본 적이 있을 테니까. 미드나잇 인 파리는 결국 파리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아주 부드럽게 꺼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