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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을 보고 며칠 뒤 이 영화를 봤다. 셋을 순서대로 이어보는 건 권하고 싶은 경험이다. 2013년작이고 그리스 카르다밀리가 배경이다. 9년 전 파리에서 재회한 제시와 셀린은 이제 함께 살고 있다. 쌍둥이 딸이 있고, 제시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행크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셀린은 자신의 커리어와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비포 선라이즈가 설렘이고 비포 선셋이 그리움이었다면, 비포 미드나잇은 그 다음이다. 사랑이 실제 삶이 됐을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이 시리즈의 가장 정직한 결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설렘에서 갈등으로, 시리즈가 옮겨간 자리
전작들을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톤이 얼마나 다른지 바로 느낄 것이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영화였다. 대화가 곧 구애였고, 침묵 속에 욕망이 있었다. 비포 미드나잇은 다르다. 차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는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게 아니라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마찰이다. 누가 더 많이 희생했는지, 누구의 커리어가 더 뒷전이 됐는지, 사소한 말 한마디가 어떻게 묵은 감정을 건드리는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전작에서 느꼈던 설렘이 어디로 갔는지를 계속 찾고 있었는데, 영화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였다. 설렘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거나, 아니면 정말 사라졌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영화 초반, 차 안에서 제시가 행크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대사가 거의 평범한 일상 대화인데, 그 안에 제시가 아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죄책감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셀린은 그 옆에서 운전하며 듣고 있는데, 그녀의 표정이 그 통화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보는 게 이 영화 전체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서였다.

호텔 방, 30분의 롱테이크가 만드는 파국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호텔 방에서 벌어지는 대화 장면이다. 거의 끊기지 않고 30분 가까이 이어지는데, 처음엔 다정하게 시작해서 점점 날카로워지다가 결국 폭발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두 사람의 말다툼 자체보다, 그 다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계속 되짚게 됐다. 사소한 오해 하나가 어떻게 9년, 18년 묵은 서운함을 끌어올리는지. 셀린이 갑자기 페미니즘과 가사노동, 희생에 대해 격렬하게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건 단순히 그 자리에서 생긴 분노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있던 게 터지는 거라는 걸 느꼈다.
이 장면이 무서운 이유는 두 사람 다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시도 셀린도 각자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 합리성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관계를 갉아먹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봐온 영화 속 부부싸움 장면 중에 가장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종류의 다툼이라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 18년의 누적
세 편을 같은 배우가 9년 간격으로 연기했다는 사실이 이 시리즈를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만든다. 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와 비포 미드나잇의 줄리 델피는 같은 사람이 연기하지만 완전히 다른 셀린이다. 실제로 18년이 지났다는 게 화면에 그대로 새겨져 있어서, 연기를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이 늙어가는 걸 보는 느낌이 든다. 호텔 방 장면에서 줄리 델피가 보여주는 분노와 무력함, 그 안에 담긴 피로감은 신인 배우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18년 동안 이 캐릭터와 함께 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다.
에단 호크도 마찬가지다.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는 낭만적이고 약간 자기중심적인 청년이었는데,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는 그 낭만이 현실과 부딪히면서 어떻게 마모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여전히 말로 상황을 풀어보려 하고, 여전히 농담으로 무거운 순간을 피하려 한다. 그 변하지 않은 부분이 오히려 셀린을 더 화나게 만든다는 게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그리스라는 배경이 하는 역할
전작들이 빈과 파리라는 낭만적인 도시였다면, 이 영화는 그리스의 한적한 해변 마을이다. 도시의 번잡함 대신 햇볕과 올리브 나무와 바다가 배경이다. 이 변화가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빈과 파리가 처음 만남과 재회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였다면, 카르다밀리는 일상이 머무는 공간이다. 휴가지인데도 여기서 두 사람은 쉬지 못한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갈등이 벌어진다는 게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평화로운 배경과 두 사람 사이의 긴장 사이의 낙차가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든다.
저녁 식사 장면에서 다른 커플들, 다양한 세대의 연인들이 둘러앉아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간도 의미가 있다. 젊은 커플, 중년 부부, 나이 든 홀로 사는 노인까지. 그 대화들이 제시와 셀린의 상황을 미리 비춰주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형태로 변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답을 미리 깔아두고, 그 다음 두 사람의 호텔 방 장면이 펼쳐지는 구조다.
시리즈를 끝까지 본 뒤 남은 생각
세 편을 연달아 보고 나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 시리즈가 사랑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포 선라이즈를 처음 봤을 때는 낭만적인 첫 만남의 영화로 기억에 남았는데, 비포 미드나잇까지 보고 나니 그 낭만이 어떻게 현실의 마찰 속에서 변형되는지를 끝까지 따라간 시리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실망스럽다기보다 오히려 더 정직하게 느껴졌다. 사랑이 영원히 설레는 채로 남아있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게 사랑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준다.
결말 부분에서 제시가 셀린에게 하는 말이 있다. 구체적으로 적지는 않겠지만, 그 장면이 이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다. 화해가 아니라 선택에 가까운 답이다. 사랑을 유지한다는 게 매번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갈등 이후에도 계속 함께 있기로 선택하는 거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게 낭만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게 더 현실적이고 더 오래가는 종류의 사랑처럼 느껴졌다.
현재 한국에서는 구독 스트리밍보다 다운로드 및 대여 플랫폼에서 찾아보는 게 더 확실하다. 세 편을 한꺼번에 보기보다, 며칠 간격을 두고 보는 걸 추천한다. 각 영화가 가진 시간의 무게를 그대로 느끼려면 그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